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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탕정 우리들교회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산미래신문 | 기사입력 2021/07/14 [18:40]

아산 탕정 우리들교회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산미래신문 | 입력 : 2021/07/14 [18:40]

▲ 우리들교회 전경  © 아산미래신문



우리들교회
꿈(비전)에 붙들려 꿈(비전)을 이루는 교회

2021년도 표어 '믿음으로 복 받는 성도'

 

▲ 담임목사 윤효식아산시 탕정면 탕정면로 210010-9940-4853  © 아산미래신문

눅18:35~43(거지 맹인의 위대한 믿음)
요한복음1:43~47절에 보면 예수님이 벳세다 마을에 가셔서 빌립을 부르셨는데, 빌립은 곧바로 자기가 만난 예수를 나다나엘에게 증거 합니다.


전도를 받고 예수께 나아오는 나다나엘을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이때 말씀하셨던 「참」은, “겉과 속이 같다”는 뜻이고, 「간사함」은, “속임수, 간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의 내면을 보시면서 “속임수를 부리지 않고 정직한 사람으로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꽤 괜찮은 나다나엘도 빌립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경험한 예수에 대해 모세 율법과 선지서에 기록된 메시야임을 소개할 때“나사렛 예수”라고 소개하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을 판단할 때 그분의 학력, 그분의 고향, 그분의 신분과 직위, 그분의 물력 등 외형적 판단을 먼저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여리고성 외곽지역을 무대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구걸하며 연명하던 맹인거지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을 보면 인격적 대우를 받을 최소한의 여지마저 박탈당한 초라한 인생임이 분명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오늘 본문의 맹인에 대해‘바디메오’라고 언급되지만, 사실 바디메오는‘디메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아버지에 대한 언급일 뿐 본인 개인 이름은 아닙니다. 그렇게 그는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인생의 삶을 살아왔지만,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거지 맹인이 눈을 뜰 때 특이한 점은, 예수께서 그의 눈을 고쳐 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즉 네 믿음이 너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거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은 분명 예수이지만, 그런 치유 능력을 이끌어 낸 것은 거지 맹인의 믿음이었다고 선언해 주신 것입니다.


길가의 잡초나 버려진 쓰레기같이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던 거지 맹인에게 기적을 일으킬만한 위대한 믿음이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측근들도 몰랐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아셨습니다.


그 맹인의 이면을 보실 수 있었던 예수님만 아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외형적인 것으로만 판단하셨다면 그는 천상 거지 맹인입니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이름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거지 맹인을 예수님은 그의 내면을 감찰하셨고, 그 속에 있는 진면모를 끄집어 내시고 선언하셨습니다. “네 안에 보석처럼 박혀있는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네 눈을 뜨게 한 원동력이 바로 믿음이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맹인의 그런 믿음이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 점을 주목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그에게는 듣는 귀가 있었습니다. 맹인으로서 그는 볼 수 있는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듣는 기능이 남아있었습니다. 여리고는 일 년 내내 예루살렘을 오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입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통해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특히 “눈먼 사람도 고쳐 주신다”는 말에는 귀가 번쩍하였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예수의 지나가심만 손꼽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기회를 포착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범한 발자국 소리 속에서 예수님의 발자국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민감하게 질문합니다.


그리고 대답을 얻습니다. 바로 그 기다리고 기대하던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절대적 기회를 붙잡습니다.


맹인이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음이 왜 중요한 줄 아십니까? 그것은 그의 들음은 일반적인 들음이 아니라 주님이 요한계시록 2~3장에서 교회들에게“칭찬과 책망, 그리고 교훈을 주시면서 말씀하실 때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실 때의 귀는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열린 귀, 영적 귀를 의미하는 것으로 거지 맹인은 그 동안에 예수님에 소문에 대해 들었을 때 그의 내면에는 믿음이 쌓이는 영적 귀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10:17절에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그렇습니다. 거지 맹인은 예수님에 대해 들었을 때 그 말씀은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었으며, 그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면서 믿음이 발생 되어 쌓이게 되었고, 그 맹인 속에 감추어진 믿음을 예수님께서는 끄집어내셔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선언하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발생하는 영적 귀만 있다면 내 신분이 어떠하든, 내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 내 신분과 직위가 어떠하든, 그 영적 귀를 통해 말씀을 들음을 통해 얻은 믿음을 주님이 사용하셔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선언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에게는 필사적으로 부르짖는 입이 있었습니다. 그곳을 지나가는 분이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소리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의 부르짖음은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했지만, 그에게는 생명을 건 투쟁이요 거룩한 기도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부르짖음을 제재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더욱 필사적으로 부르짖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오자 그 맹인의 기다림은 화산의 폭발처럼 뜨거운 기도로 분출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들음에서 얻어진 믿음으로 기도의 대상이신 예수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심을 확신했기 때문이며, 그분은 자신을 불쌍히 여기셔서 치유해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 두 마디로 이루어진 그의 부르짖음을 보십시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의 부르짖음은 가장 간결하면서도 완벽한 기도였습니다.


거지 맹인의 기도는 단 두 마디의 기도였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으며, 예수님의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게 할 만큼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확신의 믿음은 확신의 기도를 발산하게 만들고, 그 확신의 기도는 확실한 응답을 주신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막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셋째로, 그는 미래의 자기모습을 형상화한 마음의 눈,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가까이 부르신 다음 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는 망설임 없이 보기를 원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거지 맹인은 다른 그 무엇에 대한 갈급함도 많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의 대답은 가장 정확한 본질적 해결을 예수께 요청한 것입니다.


눈을 뜨는 것은 그의 가슴속에 담겨있는 미래의 비전이었습니다. 언젠가 예수를 만나게 되면, 감겨진 자신의 눈이 열릴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가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절망의 대명사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신체적으로 맹인이었고, 직업은 남의 동정심에 의지하여 사는 걸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절망의 늪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거지 맹인은 예수에 대한 말씀을 듣기 이전에는, 즉 믿음이 발생 되기 이전에는 절망의 늪을 빠져 있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듣고 믿음이 발생 된 이후에는 가슴을 불타올라 간절한 부르짖음과 보기를 원하는 소망과 믿음을 고백했을 때 주님은 그 거지 맹인의 비전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어느 거지 맹인, 그는 외관상 버림받고 포기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에게서 눈을 뜨게하는 기적의 치유 능력을 이끌어내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거룩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비록 앞을 보지 못하는 불구의 몸이었지만, 들을 수 있는 영적 귀 즉,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 맹인의 속에서는 믿음이 발생되는 영적 귀가 있었고, 그 영적 귀를 통해 발생한 믿음의 확신은 그동안 들으며, 갈망하고, 기대하던 예수님의 소식을 듣자마자 그 입은 거룩한 열정적인 입이 되어 그 예수님께 부르짖었고, 소원을 묻는 예수님에게 그동안 마음의 눈으로 형상화했던 떠 있는 눈! 세상을 볼 수 있는 눈! 그 눈을 달라고 고백했을 때, 사랑과 은혜와 능력이 한이 없으신 예수님은 그에게 내재 되어 있던 믿음을 꺼내시어 “네 믿음의 너의 눈을 뜨게 하였다”고 선언하시므로, 그 맹인은, 더 이상 맹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새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감격한 영혼은 치료의 주, 구속의 주, 영광의 주를 찬양합니다. 그 거룩한 은혜는 전염되어 주변 분들도 하나님을 찬양케 하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아산 우리들교회가 시작되다
우리들교회 담임 윤효식 목사는 시골 교회에서 약 3년 정도 시무하던 중 거룩한 소원, 즉 개척 교회 열망을 주셔서 2020년 11월 7일자로 아산 우리들교회로 오게 되어 시작되었다. 이 시작은 표면적으로는 나의 시작이요, 우리들교회의 시작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뜻의 시작이요, 하나님의 계획하신 섭리의 시작임을 믿는다.

 

우리들 교회의 2021년도의 표어
하나님의 섭리 역사로 시작된 우리들교회 2021년도 표어는「믿음으로 복 받는 성도」이다. 위의 설교를 통해 말씀을 나누었지만, 말씀을 통해 받는 「믿음의 복」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의 때에 가장 합당하게 사용하셔서 본인의 간절한 열망은 이루어지며,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들 교회의 현재는 기본에 충실한 교회

운동선수들에게 있어서 기본기는 생명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 기본기가 튼튼한 선수는 대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 세계적인 선수로 뛰고 있는 손 흥민 선수 아버지의 “대나무 뿌리”훈련법이 있는데, 대나무가 뿌리를 내려 자리를 잡는 기간이 5년 이상 걸리는데, 뿌리만 잘 내려면, 하늘을 향해 우뚝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 흥민 선수를 6살 때부터 8년 동안 기본기 훈련만 시켰답니다. 지금의 세계 최고 선수의 반열에 선 것이 우연이 아닌 기본에 충실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더더욱 그렇다고 봅니다. 교회는 기본에 충실한 교회가 되면 세계를 축복할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주께서 세워주실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본에 충실한 교회는 사도행전 2장, 6장, 11장, 17장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얻은 힌트를 통해 추구하는 기본에 충실한 교회는, 첫째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기도의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신약 교회의 시작은 120문도 들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고 강력한 성령의 임재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교회의 성도는 기도에 전력했으며(행2:42), 교회 지도자 역시도 기도에 전무했습니다(행6:6).

 

두 번째로는, 하나님 말씀의 역동성이 있는 교회입니다. 말씀의 역동성은 말씀증거자와 말씀을 듣는 자가 쌍방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도행전 6장 6절에서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 봉사에 전무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7장 1절에서 베뢰아 성도들은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말씀을 말씀답게 증거 했다는 것이고, 성도는 말씀을 말씀답게 받았다는 것입니다. 말씀 증거는 역동성 있는 은혜로운 말씀, 말씀을 받음도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은혜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예배의 역동성이 있는 교회입니다. 예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받으시고, 하나님이 성령이 운행하시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전면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 문구를 부착한 이유는 코로나 19시대에 한국교회는 성경적 예배의 흐름을 상당 부분 놓쳤다고 봅니다.


예배는 영적으로 종합 예술의 작품이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거룩하고도 은혜로운 예배에 맞는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참된 영성으로 준비, 성도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요, 말씀을 말씀답게 받으며 자신의 모든 것이 제물 되어 드릴 수 있는 준비된 영성이 있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흠향하시는 예배입니다.

 

우리들 교회는 꿈(비전)에 붙들려 꿈(비전)을 이루는 교회

꿈(비전)! 하면 요셉이 생각납니다. 요셉은 꿈(비전)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하나님이 이루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이룬 꿈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과 섭리가 있었던 꿈(비전)이었습니다. 우리들교회 역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붙들린 교회로 쓰임 받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꿈(비전)에 붙들려 꿈(비전)을 이루는 우리들교회는, 첫째로, 치유와 회복이 있는 교회입니다. 코로나 19 정국을 통해 우리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를 점검하는 기회도 되었다고 봅니다. 표면적으로 여러 가지 연약한 부분이 많이 나타났는데, 그런데 그 연약한 부분은 이면적으로 볼 때 치유를 통해 회복되어야 할 부분임을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와서 하나님을 통해 치유를 받고, 평안을 누리며 새롭게 전진하는 은혜의 충전소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평신도가 세워지는 교회입니다. 저는 목회 경험을 통해 평신도의 위대성을 체험해 보았습니다. 평신도는 성경적 은혜의 훈련을 받으면 교회, 그리고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사용 받을 수 무한한 잠재력을 소유했다고 봅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일 년간 말씀을 통해 훈련받았을 때 비로소 세상으로 하여금 저분들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임을 인정받았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제“개독교, 이젠 교회라면 지긋지긋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성경적 훈련을 통해 저분들은 틀림없는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야 합니다.

 

셋째로, 모델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꿈꾸는 교회를 말하라고 하면 사도행전의 교회를 말합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기도가 있어 성령이 충만한 교회, 말씀이 있어 생명이 태어나고 풍성한 은혜가 있는 교회, 질과 양의 부흥이 있는 교회, 영, 육 간에 어려운 분들을 섬기고 나누는 사랑과 긍휼, 그리고 교제가 있는 교회, 영혼 사랑의 열정으로 국내, 외로 선교사가 파송되는 교회가 되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아버지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교회를 꿈꾸고 그 꿈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꿈을 이루면서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 세 가지, 첫째, 세상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소유(백성)임을 세상에서 나타냈습니다. 둘째, 애굽을 비롯한 세상을 살리며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를 살리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셋째로, 죄악의 유혹을 물리치며 거룩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임을 나타냈습니다.


우리들교회는 지금은 미약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꿈(비전)을 말하며, 그 꿈을 하나님을 통해 이루어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받는 교회임을 세상에 선포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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