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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특집]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막14:32-42)

서귀포 충만한 교회 정윤봉 목사 | 기사입력 2021/11/24 [16:28]

[종교특집]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막14:32-42)

서귀포 충만한 교회 정윤봉 목사 | 입력 : 2021/11/24 [16:28]

▲ 서귀포 충만한 교회     ©아산미래신문

 

▲ 서귀포 충만한 교회 정윤봉 목사     ©아산미래신문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라는 올리브 산의 작은 동산에서 기도하셨다는 말씀과, 배신자 유다가 성전 경비원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체포하러 오기 직전의 긴장된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겟세마네에 가면 예수님께서 그 밑에서 기도하셨다는 오래 된 올리브 나무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올리브 산의 ‘겟세마네 동산 (the Garden of Gethsemane)’으로 가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동안에 여기 앉아 있어라. 내 영혼이 심히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여기서 머무르면서 깨어 있어라.” (32-34절) 예수님은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제자들에게 모두 열어 보이셨습니다. 바로 이 점이 예수님의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심정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내가 기도하는 동안 여기 머무르면서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Stay here and keep watch with me”라고 나와 있습니다.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는 말은 “나와 함께 기도하자”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심정을 제자들과 공유하기를 원하셨고,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히브리서 4:15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신다 (sympathize)’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문제들을 예수님께서도 함께 겪으신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주님께 기도하면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마가복음 말씀은 이와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가 지금 겪고 있는 괴로운 심정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이 괴로운 심정을 같이 나누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정말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고 싶은 사람은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마음을 같이 나누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엎드려서 할 수만 있다면 이 때가 지나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잔을 없애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36절) 이것이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서 이 예수님의 기도의 의미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힘들고 괴로운 시간에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이 힘든 일을 만나면 친구를 만나거나, 누구를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외출도 하지 않고 두문불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피하는 것입니다. 제일 안 좋은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친구를 만나서 맛있는 것도 먹고, 차도 마시고, 수다도 떨고 하면서, 스스로 힘든 시간을 이겨 나가는 타입의 사람들은 괜찮은 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힘든 시간을 이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심정을 모두 쏟아 놓는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답답한 마음을 털어 놓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문제의 해답을 가지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자신의 심정을 털어 놓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시험은 누구나 겪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셔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시험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그 시험을 견디고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He will show you a way out so that you can endure).” (고린도전서 10:13)

 

“He will show you a way out!” 우리에게 피할 길을 보여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셨고, 바울도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피하고, 두문불출하고, 혼자 있어서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께 꿇어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머리로는 이 사실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가 약해서 잠을 이기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마음은 원하지만 몸이 연약하구나 (For 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body is weak)!” (38절) 우리 몸의 discipline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전 육신이 연약해요!” “전 새벽형 인간이 아니예요!” 우리가 지금 이런 사치스러운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몸의 연약함을 이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기도하자고 요청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믿음의 공동체가 있는 이유입니다. 혼자도 믿음생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옆에 기도를 요청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우리 믿음생활에 큰 손실을 가져 오는지 모릅니다. 반대로, 우리에게 기도를 요청할 공동체의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격려가 되는지 모릅니다.

 

기도를 요청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 준다는, 그래서 마음에 위로가 된다는 이런 말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의 기도가 나에게 미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말씀을 전할 때,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복음의 비밀을 말할 수 있도록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에베소서 6:19)

 

누가, 누구에게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교인들에게 기도를 요청한 말씀입니다. 에베소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지금의 터키에 있는 도시입니다. 바울이 그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역사도 짧고, 아직 믿음이 약한 교회입니다. 이런 교인들이 기도나 제대로 할 줄 알까요? 그런 초보 크리스천들에게 바울 같은 믿음의 사람이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내가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어찌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로마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누가 언제 교회를 세웠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썼을 때, 바울은 아직 로마에 한번도 가 보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편지에 썼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을 전할 때마다 기도 중에 늘 여러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심으로 섬기는 하나님께서 나의 증인이 되십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여러분에게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9-10) 신실하신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갔을 때, 로마의 크리스천들이 마중 나와 그를 환영해 주었던 장면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28:15).

 

셋째로,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기도가 참된 기도란 어떤 기도인지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없애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36절)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 (communication)입니다.

 

‘소통’이라는 말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모든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소통입니다. 우리가 리더십에 대한 말을 많이 하는데, 좋은 리더십을 위한 qualification 중에 하나가 소통입니다. 그 리더가 팀원들과, 직원들과,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과 소통하는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소통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런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Abba is an Aramaic term for father’ 또, Amplified Bible에 보면 이런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Abba is an Ara-maic word used by young children when addressing their fathers, but not used by Jews in prayer be-cause of the word’s implied familiarity. Jesus’ use of the word emphasized his Father-Son relationship with God.” ‘아바’라는 말이 하나님을 너무 가깝게 부르는 말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아바’라는 말을 사용한 최초의 유대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최고로 친밀하게 부를 수 있는 용어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상투적인 말, 형식적인 말, 아무 의미 없이 사용하는 말, 습관적인 말들을 가급적 많이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들을 가지고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표현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소통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기도는 내 생각, 나의 주장을 관철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기도는 비록 내가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해할 수 없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올리브 나무 밑에 씌어진 글처럼 “아버지, 전 당신의 뜻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신뢰합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 잔을 없애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의 뜻대로 하십시오.” (36절) “Please take this cup of suffering away from me. Yet I want your will to be done, not mine.” ‘yet’ ‘but’ ‘however’ 등의 단어들은 앞의 말에 대한 반전(反轉)을 가져 오는 접속사들입니다. 이번에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에서 4가지 탄핵 이유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고 말하면서 4가지 탄핵 이유 중에 3가지는 탄핵의 이유로 볼 수 없다는 판결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도 반전이 있습니다. 이 반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에는 반전이 없습니다. “Please take this cup of suffering away from me” 우리의 기도는 항상 이렇게 끝이 납니다. ‘But’이라고 말하는 반전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에 이 ‘반전’이 있을 때, 우리의 기도는 참된 기도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반전을 배워야 합니다.

 

끝으로, 한가지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는 주님의 말씀대로 기도하지 않고 모두 잠을 잤습니다. 우리는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참 한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마지막 밤을 기도하면서 보내셨고, 내가 지금 마음이 너무 힘드니, 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는 주님의 요청을 들어드리지 못하고 잠을 잤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아시나요? 그 날 밤 예수님은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받아 들이셔야 했습니다. 그 힘든 시간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예수님은 홀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우리의 주님이 되기 위해서요.

 

예수님은 피곤하여 잠을 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가자! 나를 넘겨 줄 사람이 오고 있다 (4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는 우리들의 연약함, 우리들의 불순종과 관계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 버립니다. 저는 “일어나라! 가자!”는 말씀을 읽으면서, 뭔가 알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아쉬움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지상에서의 주님의 마지막 요청을 들어 드리지 못했던 아쉬움이 아닐까요? 그것은 주님과 함께 그 밤에 깨어서 기도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아닐까요?

 

5년 후, 10년 후에 우리는 지난 날들을 돌아 보면서 이런 아쉬움을 갖게 될지 모릅니다. “내가 왜 그 때 기도하지 않았지? 그 때가 내 인생의 가장 critical time이었는데, 왜 나는 그 때 기도하지 않았지?” 이런 아쉬움 마음을 갖게 될지 모릅니다. “일어나라! 가자!” 이런 주님의 음성이 있기 전에 주님의 요청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위한 최선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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